창조원리 : 6. 창조본연의 가치 결정과 그 기치의 기준 : 5) 사랑과 미, 선과 악, 의와 불의

 原理本体論は絶対性についても説明されており、生殖器などの用語が何度も登場します。このような内容は基本的に祝福を受けられ、家庭を出発されている方にお話しする内容であり、まだ祝福を受けられていない方、18歳未満の方には不適切な内容と思われますので、該当される方はこの書籍の閲覧をおやめ下さい。堕落論にもあるように、時ならぬときに時のことを知ろうとすることは罪の動機にもなります。よろしくお願いします。
 翻訳の部分は管理者のハングルの能力によって作成されておりますので、専門家の翻訳ではありませんので、ご了承下さい。

'사랑과 미', '선과 악', '의와 불의'는 모두가 어떤 가치 평가에 대한 표현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것은 사랑이다.', '이것은 미다.'하고 '사랑'과 '미'를 따로 구분해서 평가합니다. 그러나 사랑 안에도 '미'가 있고, '미' 안에도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선과 악'의 경우는 '사랑과 미'와 같지 않습니다. '사랑과 미'가 동질성을 지닌 것과 달리 '선과 악'은 지향하는 방향과 목적이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선과 악을 다루는 것은 타락세계의 인간들이 악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을 선으로 잘못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을 정확히 규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이냐?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냐? 하는 것을 제대로 판단하는 것이 올바른 가치 평가입니다.
'의와 불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것이 의로운 것이고 어떤 것이 불의한 것인지, 어떤 사람이 의인이고 어떤 사람이 불의의 인간인가를 구분하지 못하고, 자기 마음에 들면 좋은 사람이라 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옳은 말을 하더라도 그것을 들으려 하지 않고 그 말이 옳지 않다고 판단합니다. 창조본연의 가치를 놓고 볼 때 그런 평가 기준은 모두 정리되어야 합니다.
【翻訳】
 愛と美,善と悪,義と不義は皆がある価値評価に対する表現です。人々はよくこれは愛だ。,これは美だ。を別々に区分して評価します。しかし愛の中にもがあり、の中にも愛が入っています。
 善と悪の場合は愛と美の場合と同じでありません。愛と美が同質性を持つことと違い、善と悪は指向する方向と目的が違います。ところで、私たちがここで善と悪を扱うのは、堕落世界の人間が悪を追求しながらも、それを善と間違って判断するためです。善と悪を正確に規定することができなければなりません。何が真であり、何が偽りなのか? 何が善であり何が悪なのか? ということを、まともに判断することが正しい価値評価です。
 義と不義も同じことです。どんなものが義に徹したことであり、どんなものが不正なことなのか、どんな人が義人であり、どんな人が不義の人間なのかを区分できなくて、自分の気に入れば良い人と言い、気に入らなければ正しい言葉を話しても、それを聞こうとしないで、その言葉が正しくないと判断します。創造本然の価値をおいて見ることによって、そのような評価基準は全部、整理さ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

(1)사랑과 미
하나님으로부터 분립된 이성의 실체가 성상과 형상, 또는 양성과 음성입니다. 그것이 각각 주체와 대상이 됩니다. 그 주체와 대상이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을 하면 합성일체화한 하나님의 제3대상이 나타나는데, 그때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가 이루어집니다. 3대상이 나타나지 않으면 사위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위기대를 이루기 전에 하나님의 제3대상으로 합성일체화하기 위하여 주체가 대상에게 주는 정적인 힘을 사랑이라고 하고, 대상이 주체에게 돌리는 정적인 힘을 미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수수작용은 주체와 대상이 사랑과 미를 주고받는 것입니다.
【翻訳】
(1)愛と美
 神様から分立した二性の実体が性状と形状、または、陽性と陰性です。それが、それぞれ主体と対象になります。その主体と対象が相対基準を作り、授受作用をすれば合成一体化した神様の第3対象が現れますが、その時、神様を中心とする四位基台が成し遂げられます。3対象が現れなければ四位基台が成り立ちません。
 四位基台を成し遂げる前に、神様の第3対象として合成一体化するために主体が対象にあたえる情的な力を愛といい、対象が主体に返す情的な力を美といいます。したがって授受作用とは主体と対象が愛と美を授け受けすることです。

사랑의 힘은 동적이고, 미의 자극은 정적입니다. 남자가 주체이고 여자가 대상일 경우 일반적으로 남자가 여자에게 주는 사랑은 동적입니다. 그때 여자가 나타내는 반응은 미가 되는데 그 반응은 정적입니다. 남자의 사랑 표현은 적극적인 반면에 여자의 사랑 표현은 소극적입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 때에 따라서 여자가 남자보다 더 적극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 속에도 미가 있고, 미 속에도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쪽만 고집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사랑과 미는 수수작용을 하기 위한 요소로서 두 요소는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翻訳】
 愛の力は動的であり、美の刺激は静的です。男性が主体であり、女性が対象の場合、一般的に男性が女性にあたえる愛は動的です。その時、女性が現わす反応は美になるので、その反応は静的です。男性の愛の表現は積極的である反面、女性の愛の表現は消極的です。
 しかし人により、また時により、女性が男性よりもさらに積極的な場合もあります。それが愛の中にも美があり、美の中にも愛があるためです。それで、片方だけに固執するのは誤りです。愛と美は授受作用をするための要素として存在し、この二つの要素は調和を作り出さなければなりません。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중심으로 한 사랑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이 그것입니다. 그 세 가지 사랑을 3대사랑이라고 표현하지만, 자녀의 사랑에는 형제의 사랑이 포함되기 때문에 실제로는 4대사랑입니다.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형제의 사랑, 자녀의 사랑, 이렇게 4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뿌리가 바로 심정입니다. 4대 사랑이 하나님 안에 있는 심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4대심정권에서 참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체 속에 4대심정권을 가지고 있지만, 실체를 통하지 않고 서는 참사랑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 실체가 없으면 참사랑을 실감할 수 없고 성취욕도 충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4대심정권의 본체로 성장해 왔고, 그 심정을 실감하기 위해서 직접 아담과 해와를 창조했습니다.
【翻訳】
 神様の創造理想を中心とした愛には三の種類があります。父母の愛、夫婦の愛、子女の愛がそれです。その三種類の愛を3大愛と表現しますが、子女の愛には兄弟の愛が含まれるので実際には4大愛です。父母の愛、夫婦の愛、兄弟の愛、子女の愛、このように4大愛です。その愛の根元が、まさに心情です。4大愛が神様の中にある心情から出てきたのです。4大心情圏から真の愛が出てくるのです。
 神様は自体の中に4大心情圏を有していますが、実体を通じないで立てなければ真の愛を実現できません。 実体がなければ、真の愛を実感できず、成就欲も充足できないというのです。それで、神様も4大心情圏の本体に成長してきたのであり、その心情を実感するために直接、アダムとエバを創造されたのです。

아담, 해와가 완성한다는 말은 곧 4대심정권의 완성을 뜻합니다. 아담, 해와가 4대심정권을 완성하면 하나님도 완성한 자리에 서게 됩니다. 4대심정권을 이루기 위한 것이 '따먹지 말라.'하는 말씀이고, 그 말씀은 절대성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절대성의 사랑은 세 종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기대가 사위기대, 곧 가정입니다. 가정의 구성원은 부모, 부부, 자녀입니다. 그래서 가정은 여섯 사람을 기본으로 하여 구성됩니다.
【翻訳】
 アダム、エバが完成するという言葉は、まさに4大心情圏の完成を意味します。アダム、エバが4大心情圏を完成すれば、神様も完成した位置に立つことになります。4大心情圏を成し遂げるためのものが'取って食べるな。'という御言であり、その御言は絶対性を守るということでした。
 絶対性の愛は三の種類に分類できます。父母の愛、夫婦の愛、子女の愛です。その愛を実現するための基台が四位基台、すなわち家庭です。家庭の構成員は父母、夫婦、子女です。それで家庭は六人を基本として構成されます。

맨 처음 자녀는 부모에 의해서 존재합니다. 그 자녀가 부부의 자리를 거쳐 자녀를 낳으면 맨 처음의 부모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자리로 가게됩니다. 맨 처음의 부모가 없었다면 할아버지, 할머니도 없습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의 자리를 거쳐서 부모가 되는 것이지, 부부의 자리를 거치지 않고 부모가 되는 법을 없습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의 자리를 거쳐서 부부가 되는 것이지, 자녀의 자리를 거치지 않고서는 부부가 될 수 없습니다.
결국 부모가 있어야 자녀가 있고, 자녀가 있어야 부모도 완성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과 미로 귀결되는 수수작용의 관계입니다. 수수작용의 관계가 정립되지 않으면 완성이라는 말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창조이상의 완성을 위해서는 수수작용이 필수 요건입니다.
【翻訳】
 一番最初に子女は父母によって存在します。その子女が夫婦の位置を位置を経て子女を産めば、一番最初の父母はおじいさん、おばあさんの位置に行くことになります。一番最初の父母がいなかったとすれば、おじいさん、おばあさんもいません。父母も同じことです。夫婦の位置を経て父母になるのであって、夫婦の位置を経ないで父母になる方法はありません。夫婦も同じことです。子女の位置を経て夫婦となるのであって、子女の位置を経ずには夫婦になることができません。
 結局、父母がいてこそ子女があり、子女がいてこそ父母も完成されます。それがまさに、愛と美として帰結される授受作用の関係です。授受作用の関係が確立されなければ完成という話も成立しません。創造理想の完成のためには授受作用が必須要件です。

수수작용의 결과, 대상이 주체에게 돌리는 '미'가 나타나는데, 미는 세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충','효','열'이 그것입니다. 이미 밝힌 대로 '충'은 마음에 중심을 세우는 것입니다. 마음의 중심이 바로 부모입니다.
나는 부모에서 출발했습니다. 부모에 의해서 태어났고, 부모에 의해서 심정과 사랑과 인격을 느끼고 배웁니다. 거기서부터 사회, 국가, 세계로 더 높은 차원을 향해 심정의 생활환경을 넓혀 가야 합니다. 그래서 내 마음의 중심은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翻訳】
 授受作用の結果、対象が主体に戻す'美'が現れますが、美は三つに区分できます。'忠','孝','烈'がそれです。すでに明らかにした通り'忠'は心の中心を立てるのです。心の中心がまさに父母です。
 私は父母から出発しました。父母によって生まれたし、父母から心情と愛と人格を感じて学びます。そこから社会、国家、世界へと、さらに高い次元に向かって心情の生活環境を広めてい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れなので私の心の中心は父母になるのです。

내 마음의 중심은 부모인데, 그 부모의 뿌리는 심정의 본체이신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정복하는 것이 바로 충입니다. 내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마음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이라는 신념으로 사는 것이 충이라는 것입니다.
나를 낳아준 부모는 비록 두 분이지만, 그 부모에서 부모로 올라가면 결국 인류는 최초의 조상인 한 남자, 한 여자를 부모로 하여 태어났습니다. 그 최초의 조상은 뿌리가 하나님입니다. 최초의 조상은 내 육신의 뿌리가 되지만, 하나님은 내 영원한 영인체의 뿌리가 되는 분입니다. 만민공통의 부모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류의 참부모입니다.
【翻訳】
 私の心の中心は父母であり、その父母の根は心情の本体であられる神様です。そのために、神様を征服することがまさに忠です。私の心の中心に神様を迎えて、神様の心により、神様の御旨が私の御旨という信念で生きるということが忠だというのです。
 私を生んでくれた父母は、たとえお二方であったとしても、その父母から父母へと上に上がれば結局、人類は最初の先祖である一人の男性、1人の女性を父母にして生まれました。その最初の先祖は根元が神様です。最初の先祖は私の体の根元になりますが、神様は私の永遠の霊人体の根元になる方です。万民共通の父母は神様です。それで神様は人類の真の父母なのです。


모든 인간은 마음의 중심이 부모인데, 그 부모의 근원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충은 하나님의 정복하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살면 하나님의 마음을 정복하는 것이 됩니다.
넒은 의미에서 충이 하나님을 정복하는 것이라면, '효'는 나를 낳아준 부모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듯이 내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부모를 위하고 사랑하는 것이 효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부모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翻訳】
 すべての人間は、心の中心が父母であるのに、その父母の根源であられる方が神様です。それで、忠は神様の征服することだと言ったのです。真心で神様のために生きれば、神様の心を征服することになります。
 広い意味で、忠とは神様を征服することというならば、'孝'は私を生んでくれた父母を征服することです。神様のためにと言う意味で、私の心とみ意と性分をつくして父母のために愛することが孝です。そのような心を持っている人が父母を征服するのです。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다.'(요한복음 14장 10절)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부모의 중심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중'은 하나님을 정복하는 것이고, '효'는 부모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은 상대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충과 효는 종적인 관계이고, 열은 횡적인 관계입니다. 열은 상대적 개념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래서 열남, 열녀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남자와 여자는 자녀로서 종적인 관계이지만, 그 남자와 여자는 횡적인 관계입니다. 상대적인 관계에서 '열'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翻訳】
 '私は父の中にあって、父が私の中にいらっしゃる。'(ヨハネ福音14章10節)はイエス様の御言のように、父母の中心が神様なので、'忠'は神様を征服することであり、'孝'は父母を征服することです。
 そして'烈'は相対を征服することです。忠と孝は縦的な関係であり、烈は横的な関係です。烈は相対的概念から出てきた言葉です。それなので烈男、烈女が必要なのです。神様の立場からすると男性と女性は子女として縦的な関係ですが、その男性と女性は横的な関係です。相対的な関係で'烈'を立て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횡적으로 볼 때 절대성의 본체인 아버지 앞에 실체적인 절대성 중심한 생식기의 주인은 상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를 절대적으로 믿고 사랑하고, 상대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남자의 경우 부인을 절대적으로 믿고 사랑하고, 그에게 복종하면 열남이 되고, 여자의 경우 남편을 절대 믿고 절대 복종했을 때 열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 열남, 열녀의 본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절대성을 중심해서 아버지가 되기 때문에 실체로 나타난 상대권에 있는 남자나 여자는 절대성을 중심한 열남, 열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翻訳】
 横的に見る時、絶対性の本体であられるお父様の前に、実体的な絶対性の中心である生殖器の主人は相対です。そのために、'烈'というのは相対を絶対的に信じて愛して、相対に服従することです。
 男性の場合、夫人を絶対的に信じて愛して、彼女に服従すれば烈が現れることになり、女性の場合、夫を絶対に信じて、絶対服従した時には烈女になるのです。その烈男、烈女の本体は神様でいらっしゃられます。神様が絶対性を中心としてお父様になるので、実体で現れた相対圏にある男性と女性は、絶対性を中心としたそ烈男、烈女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그런데 타락한 세계에는 충신은 있지만 충녀는 없습니다. 여자가 하나님을 중심한 나라의 이상을 갖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효와 열'도 마찬가지입니다. 효자, 효녀가 있고 열녀가 있지만 열남은 없습니다.
본연의 세계에서는 충, 효, 열의 가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충신이 있듯이 충녀도 있어야 하고, 효자, 효녀가 있고, 열녀가 있듯이 열남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가치는 절대성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 절대성을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충'도 없어지고, '효'도 없어지고, '열'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翻訳】
 ところで、堕落した世界には忠臣はいますが忠女はいません。女性が神様を中心とする国の理想を持てなかったという意味です。'孝と烈'も同じです。孝行息子、孝行娘がいて、烈女はいますが烈男という人はいません。
 本然の世界では忠、孝、烈の価値を正しく立てるために忠臣がいるように、忠女もいなければならず、孝行息子、孝行娘がいて、烈女がいるように烈男という人もいなくては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その価値は絶対性の上に立てられるのです。その絶対性を失えばすべて失うことになります。'忠'もなくなり、'孝'もなくなり、'烈'もなくなるのです。

앞에서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중심해서 분립된 주체와 대상은 서로 주고받는데 주체가 대상에게 주는 정적인 힘을 사랑이라 하고, 대상이 주체에게 돌려주는 정적인 힘을 미라고 했습니다. 또 사랑 안에도 '미'가 들어 있고, '미'안에도 사랑이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사랑과 미는 주고받으면 주고받을수록 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체의 사랑이 없으면 대상에게서도 미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대상이 지닌 '미'의 가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님니다. 대상의 가치는 그대로입니다.
【翻訳】
 前に神様の創造理想を中心として分立した主体と対象は、互い授け受けするのにおいて、主体が対象にあたえる静的な力を愛といい、対象が主体に戻す静的な力を美といいました。また、愛の中にも'美'が入っており、'美'の中にも愛が入っているといいました。
 愛と美は授け受けすればするほど大きくなるのです。それで主体の愛がなければ、対象からも美があらわれません。それで対象が持っていた'美'の価値がなくなるというのは違います。対象の価値はそのままなのです。

사람이 아무리 못생겼다 하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이 있습니다. 저마다의 개별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개성진리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놓고 '마음에 안 든다, 밉다, 싫다.'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밉고 싫다 하더라고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가치는 절대적입니다.
그것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된다. 그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결과가 됩니다. 결국 미의 가치는 사랑을 통해 나타나는데, 그것이 충, 효, 열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翻訳】
 人がいくらぶさいくだったとしても、神様から与えられた本性があります。各々の個別相があります。それで個性真理体というのです。それなので人を置いて'気に入らない、憎い、嫌いだ。'で判断してはいけません。いくら憎くて嫌いであっても、その人が持っている価値は絶対的です。
 それをむやみに判断してはいけません。その話です。それは神様を無視する結果になります。結局、美の価値は愛を通じて現れますが、それが忠、孝、烈として現れるのです。

(2)선과 악
주체와 대상이 사랑과 미를 잘 주고받아 합성일체화함으로써 하나님의 삼대상이 되어 사위기대를 조성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삼대상이 되지 않으면 사위기대도 이루지지 않습니다.
삼대상이 이루지기 위해서는 하나님 속에서 분립된 주체과 대상이 잘 주고 잘 받아야 합니다. 주체와 대상이 수수작용을 해서 합성일체화하면 하나님의 삼대상으로 나타납니다. 그 삼대상이 서로 수수작용하면 사위기대가 조성되어 하나님의 찯조목적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성취하는 행위나 그 행위의 결과를 선이라고 합니다.
반면 사탄을 중심하고 사위기대를 조성함으로써 사탄의 목적을 성취하는 행위나 그 행위의 결과를 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하면 선이 되고, 사탄을 중심하면 악이 된다. 그 말입니다.
【翻訳】
(2)善と悪
主体と対象が愛と美をよく授け受けして、合成一体化することによって、神様の三対象となり、四位基台を作ります。なので、神様の三対象にならなければ、四位基台も到底成し遂げられけません。
 三対象を成し遂げるためには、神様の中で分立した主体と対象がよく授けて、確かに受け取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主体と対象が授受作用をして合成一体化すれば、神様の三対象として現れます。その三対象が互いに授受作用すれば、四位基台が造成されて神様の創造目的が成就するのです。そのような神様の創造目的を成就する行為や、その行為の結果を善といいます。
 反面、サタンを中心として四位基台を作ることによって、サタンの目的を成就する行為やその行為の結果を悪といいます。神様を中心とすれば善となり、サタンを中心とすれば悪となる。その話です。

앞으로 타락론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원래는 악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악이 생겨났습니다. 악의 주체는 사탄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시종인 동시에 인간의 종이었습니다. 그 종이 하나님의 자녀를 타락시켜 자기 자녀로 만들었습니다. 자기의 존재위치를 떠났기 때문에 사탄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척을 놓고 볼 때 그것은 원리가 무시된 것입니다. 그것이 악입니다.
선과 악의 개념을 확실히 세워야 합니다. '선이 있으니까 악이 있고, 악이 있으니까 선이 있다.'는 상대개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선과 악은 상대적 개념이 아니라 상반적 개념입니다. 선과 악은 한 점에서 출발했지만, 둘은 동기와 목적이 다르고 방항도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둘이 만나면 갈등하고 투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翻訳】
 今後、堕落論で詳しく説明するでしょうが、本来は悪がなかったのです。ところが人間の堕落によって悪が生じました。悪の主体はサタンです。サタンは神様の侍従であると同時に人間の僕でした。その僕が神様の子女を堕落させて、自分の子女に作りかえました。自らの存在位置を離れたので、サタンになったのです。神様の原則をおいてみる時、それは原理が無視されたのです。それが悪です。
 善と悪の概念を確かに立てなければなりません。'善があるから悪があり、悪があるから善がある。'という相対概念は成立しません。善と悪は相対的概念ではなく、相反的概念です。善と悪は一点から出発しましたが、二つは動機と目的が違い、方向も違います。そのために二人が会えば葛藤が生じて闘争を行うのです。

(3)의와 불의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선을 위한 생활적인 요소를 의라고 하며, 악의 목적, 다시 말하면 사탄의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그 악을 위한 생활적인 요소를 불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선을 위한 생활은 의가 되고, 악을 위한 생활은 악이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의로운 자리에 있느냐, 의롭지 못한 자리에 있느냐?'하는 것도 역시 '나 자신이 하나님을 중심해서 살고 있느냐, 하나님을 중심해서 살고 있지 않느냐? 내 생각이 하나님의 뜻을 중심한 선의 목적과 방향을 따르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냐?'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그러니까 의와 불의는 어떤 학문적 단어로 설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생활적으로 표현되는 실천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중심이 하나님이냐, 아니냐?'하는 문제가 따릅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동기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일체가 됩니다. 생활을 통해 의로운 사람과 의롭지 못한 사람이 구분되는 것입니다.
【翻訳】
(3)義と不義
 目的を成し遂げる過程で、善のための生活的な要素を義だとしながら、悪の目的、言い換えればサタンの目的を成し遂げる過程で、その悪のための生活的な要素を不義といいます。なので善のための生活は義となり、悪のための生活は悪になるという言葉です。
 '私が義に徹した位置にあるのか、義に徹することが出来なかった位置にあるのか?'ということも、やはり'私自身が神様を中心として生きているのか、神様を中心として生きていないのか? 私の考えが神様の御心を中心とする善の目的と方向に従っているのか、そうでないのか?'にしたがって決定されます。
 なので義と不義はどのような学問的な単語としても説明され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そこには生活的に表現される実践要素が入っています。それはいつも'中心が神様か、違うのか?'という問題に従います。いつも神様が動機で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れでこそ神様が私の中に入ってきて一体になります。生活を通じて義に徹した人と義に徹することが出来なかった人が区分されるのです。